주식투자를 하다 보면 매수보다 더 어려운 게 있다.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몇 년 전 가입한 펀드가 있다. 수익률도 별로고 운용보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굳이 가입하지 않을 상품이다.
그런데 계속 가지고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굳이 바꿔야 하나?”
주식도 비슷하다.
포트폴리오에 10개 종목이 있는데 그중 몇 개는 지금 처음 봤다면 절대 사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매도하지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면 딱히 없다.
그냥 원래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를 현상 유지 편향(Status Quo Bias)이라고 한다.
현상 유지 편향이란 무엇일까?
현상 유지 편향은 여러 선택지가 있어도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사람은 변화보다 익숙함을 편하게 느낀다.
문제는 현재 상태가 최선이 아닐 때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요금제가 대표적이다.
몇 년 전 가입한 요금제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찾아보니 더 싸고 좋은 요금제가 있다.
바꾸면 매달 돈을 아낄 수 있다.
그런데 귀찮다.
비교해야 하고 신청해야 하고 혹시 뭔가 잘못될까 걱정도 된다.
결국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쓰던 거 쓰지 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선택이 몇 년씩 쌓이면 꽤 큰 돈이 된다.
이 개념은 어떻게 유명해졌을까?
현상 유지 편향은 경제학자 William Samuelson과 Richard Zeckhauser가 1988년 발표한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에게 여러 선택지를 제시했을 때 특정 선택지를 현재 상태라고 설정하면 그 선택을 고르는 비율이 높아지는 현상이 관찰됐다.
선택지의 경제적 가치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이렇게 되어 있었다.”
라는 사실 자체가 의사결정에 영향을 준 것이다.
생각해보면 투자에서도 정말 많이 나타나는 행동이다.
투자에서 가장 흔한 것은 방치된 포트폴리오다
처음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는 꽤 열심히 공부한다.
한국주식 30%.
미국주식 40%.
채권 20%.
금 10%.
나름 이유가 있어서 비중을 정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산 가격이 움직인다.
주식이 크게 오르면서 어느 순간 주식 비중이 70%가 되어 있다.
처음 계획과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데 리밸런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상태를 바꾸는 순간 내가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놔두면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게 굉장히 편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 결정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현재 포트폴리오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선택한 것과 결과적으로 같기 때문이다.
회사 퇴직연금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퇴직연금이나 장기 투자계좌에서도 비슷하다.
처음 가입할 때 선택했던 상품을 몇 년 동안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 투자기간도 달라지고 시장 환경도 바뀌고 다른 상품도 등장한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꾸는 것보다 그냥 두는 게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자에서는 가끔 “내가 지금 새로 시작한다면 이 포트폴리오를 그대로 만들까?”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
현금도 현상 유지 편향의 대상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투자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통장에 5,000만 원이 있다.
몇 년 동안 그대로 있다.
본인도 물가 때문에 현금의 구매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투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투자하는 순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식을 살지, 채권을 살지, ETF를 살지 결정해야 한다.
손실 가능성도 생긴다.
반면 통장에 그냥 두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현재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내가 오늘 현금 5,000만 원을 처음 받았다면 정말 전부 예금에 둘까?”
YES라면 괜찮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런데 NO라면 지금의 자산배분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단순히 오래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손실 난 종목을 방치하는 것과도 조금 다르다
얼핏 보면 처분 효과나 매몰비용 오류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가 조금 다르다.
처분 효과는 손실을 확정하기 싫어서 보유하는 것이고, 매몰비용 오류는 이미 투입한 돈과 시간이 아까워 계속 끌고 가는 것이다.
현상 유지 편향은 훨씬 단순하다.
그냥 바꾸지 않는 것이 편해서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익 중인 종목에서도 나타날 수 있고 ETF나 예금, 보험, 연금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소비에서는 자동결제가 대표적이다
나는 현상 유지 편향을 설명할 때 자동결제가 정말 재미있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OTT 하나를 가입했다.
처음 몇 달은 잘 봤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보지 않는다.
매달 결제는 계속된다.
월 1만 원 정도라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간다.
만약 매달 직접 카드번호를 입력해서 결제해야 한다면 아마 진작 해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동결제가 되어 있으니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곧 결제를 계속하는 선택이 된다.
기업들이 구독 서비스에서 자동결제를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꽤 재미있다.
보험도 한번 가입하면 잘 안 바꾼다
보험도 비슷하다.
10년 전에 가입한 보험이 있다.
당시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가족 상황이나 자산 규모가 달라졌다.
보장 내용이 중복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잘 확인하지 않는다.
보험은 구조도 복잡하고 다시 공부하기도 귀찮다.
그래서 그냥 유지한다.
물론 오래된 보험이 무조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과거 상품의 조건이 더 좋은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오래됐기 때문에 유지하는 것과 현재도 좋은 상품이라 유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현상 유지 편향이 무서운 진짜 이유
이 편향이 무서운 이유는 손실이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식이 하루에 -10% 떨어지면 바로 보인다.
하지만 비효율적인 금융상품을 10년 동안 유지하면서 조금씩 발생하는 기회비용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매달 2만 원씩 불필요한 구독료를 내는 것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포트폴리오를 리밸런싱하지 않아 위험이 조금씩 커지는 것도 당장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현상 유지 편향은 조용하다.
돈을 한 번에 크게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새어나가게 만들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하나의 투자 결정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투자자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자.”
물론 장기투자에서는 불필요한 매매를 하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장기투자와 방치는 다르다.
기업을 분석한 뒤 투자 논리가 유지되고 있어서 보유하는 것은 장기투자다.
아무 생각 없이 원래 가지고 있었으니까 보유하는 것은 현상 유지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
현상 유지 편향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현재 상태를 기본값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모든 자산을 처음 보는 것처럼 다시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해본다.
“내가 오늘 이 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면 똑같이 투자할까?”
주식도 마찬가지다.
지금 포트폴리오를 모두 현금으로 바꿔놓았다고 상상해본다.
그 돈으로 지금 가지고 있는 종목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시 살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 포트폴리오를 유지할 이유가 있다.
그런데 전혀 다르게 구성하고 싶다면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자동으로 점검하는 날짜를 정해두자
현상 유지 편향을 줄이는 데는 의외로 정기점검이 효과적이다.
연초나 생일처럼 기억하기 쉬운 날짜를 하나 정해서 금융상품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금, 보험, 연금, ETF, 주식, 구독서비스까지 한 번씩 살펴본다.
무조건 바꾸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계속 유지할 이유가 있는지만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하고도 괜찮다면 그대로 두면 된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방치가 아니라 의도적인 유지가 된다.
김프로 한마디
투자를 오래 하다 보니 매수와 매도만 결정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 번째 선택이 있다.
그대로 두는 것.
문제는 이 세 번째 선택을 우리는 결정이라고 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식을 안 팔았으니 아무것도 안 했다.
보험을 안 바꿨으니 아무것도 안 했다.
구독을 해지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안 했다.
하지만 돈의 입장에서는 전부 선택이다.
그래서 가끔 내 계좌를 보면서 이렇게 물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게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면, 오늘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까?”
YES라면 그냥 두면 된다.
NO라면 한번 움직여볼 때가 된 것이다.
투자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고 가만히 있는 것과 귀찮아서 가만히 있는 것은 전혀 다른 투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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