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에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있다고 해보자.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는 4,500원이다.
그런데 계산하려고 지갑을 열어보니 5만 원짜리밖에 없다.
이상하게 조금 아깝다.
“이걸 깨야 하나?”
반대로 지갑에 1만 원짜리 다섯 장이 들어 있다면 어떨까?
같은 5만 원이다.
내 재산도 똑같다.
그런데 커피 한 잔을 사는 부담은 묘하게 작아진다.
더 재미있는 상황도 있다.
5만 원짜리를 결국 사용하고 거스름돈으로 1만 원짜리 여러 장과 잔돈을 받았다.
그다음부터는 돈 쓰기가 조금 편해진다.
커피도 사고 간식도 사고 편의점에도 들른다.
아침에는 분명 5만 원이었는데 저녁에는 몇 천 원만 남았다.
돈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오늘 이야기해볼 개념은 화폐단위 효과(Denomination Effect)다.
화폐단위 효과란 무엇일까?
화폐단위 효과는 같은 금액의 돈이라도 큰 단위로 가지고 있을 때보다 작은 단위로 나누어 가지고 있을 때 소비하기 쉬워지는 현상을 말한다.
5만 원짜리 한 장과 1만 원짜리 다섯 장의 경제적 가치는 같다.
그런데 사람은 두 상황을 완전히 똑같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큰 지폐를 사용하면 하나의 큰 자산을 깨뜨리는 느낌이 든다.
반대로 작은 지폐는 이미 소비하기 좋은 형태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큰 단위의 돈을 사용하는 데 심리적인 저항이 생길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이것이다.
“큰돈은 깨면 금방 없어진다.”
그냥 옛날 어른들의 잔소리인 줄 알았는데 행동경제학적으로 꽤 재미있는 현상이다.
실제 연구에서도 관찰된 현상이다
화폐단위 효과는 소비자 행동 연구에서 실제로 다뤄져 왔다.
대표적으로 마케팅 연구자인 Priya Raghubir와 Joydeep Srivastava는 사람들이 같은 금액이라도 큰 단위의 화폐를 가지고 있을 때 지출을 꺼리는 경향을 연구했다.
핵심은 돈의 총액이 아니다.
돈이 어떤 형태로 나뉘어 있느냐가 소비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꽤 이상하다.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면 5만 원짜리 한 장이나 1만 원짜리 다섯 장이나 정확히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 사람의 소비는 그렇게 기계적이지 않다.
왜 큰 지폐는 깨기가 아까울까?
5만 원짜리 한 장을 가지고 있으면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완성된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4,500원짜리 커피를 사는 순간 이 덩어리가 깨진다.
거스름돈을 받지만 심리적으로는 이미 5만 원짜리를 사용했다는 느낌이 남는다.
반대로 1만 원짜리가 여러 장 있다면 하나를 꺼내는 부담이 상대적으로 작다.
전체 자산 중 일부만 사용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실제 비용은 4,500원으로 똑같은데 지불할 때 느끼는 심리적인 비용은 달라질 수 있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무서운 이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요즘은 현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폐단위 효과가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더 재미있는 문제가 생긴다.
카드에는 지폐의 단위 자체가 없다.
5만 원짜리를 깨는 순간도 없다.
10만 원이 사라지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카드를 한 번 긁거나 스마트폰을 갖다 대면 끝난다.
결제의 물리적인 저항이 상당히 줄어든다.
그래서 현금에서 느꼈던 ‘큰돈을 깨는 아까움’이라는 일종의 소비 브레이크를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투자계좌의 현금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투자계좌에 현금 1,000만 원이 있다고 해보자.
한 종목에 1,000만 원을 한 번에 투자하려면 꽤 고민된다.
그런데 100만 원씩 열 번 매수한다고 생각하면 느낌이 달라진다.
각각의 매수는 작아 보인다.
“100만 원 정도만 더 사지 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1,000만 원이 전부 들어가 있다.
이건 화폐단위 효과와 완전히 동일한 상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돈을 작은 단위로 바라볼 때 전체 위험의 크기를 놓치기 쉬운 모습은 비슷하다.
그래서 추가매수를 반복할 때는 한 번의 매수금액보다 최종적으로 얼마까지 투자할지를 먼저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타기에서 특히 조심해야 한다
주가가 떨어진다.
100만 원 추가매수.
또 떨어진다.
다시 100만 원.
한 번 한 번은 별로 큰돈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다섯 번 반복하면 500만 원이다.
열 번이면 1,000만 원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질문했다면 어땠을까?
“이 종목에 앞으로 1,000만 원을 더 넣을 것인가?”
조금 더 신중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금액으로 쪼개진 결정은 전체 규모를 감추기도 한다.
배당금도 작은 돈처럼 느껴지기 쉽다
배당투자를 하다 보면 매달 몇 만 원, 몇십만 원씩 현금이 들어온다.
이 돈은 묘하게 원금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배당으로 받은 돈인데 뭐.”
그래서 소비하기 쉬워진다.
하지만 배당금 역시 내 투자자산에서 만들어진 현금흐름이다.
10만 원씩 12개월이면 120만 원이다.
20년 동안 재투자하면 훨씬 큰 차이를 만들 수도 있다.
작게 들어온다는 이유만으로 작은 돈은 아니다.
돈의 크기는 입금 단위가 아니라 누적된 총액으로 봐야 한다.
포인트와 마일리지는 더 쉽게 느껴질 수 있다
카드 포인트 5만 점이 있다.
현금 5만 원을 쓰는 것보다 부담이 작다.
“포인트니까 그냥 쓰지 뭐.”
상품권도 비슷하다.
월급 통장에서 10만 원을 쓰는 것과 선물 받은 상품권 10만 원을 쓰는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점에서는 둘 다 가치가 있다.
돈의 형태가 바뀌는 순간 내 자산이라는 느낌까지 약해질 수 있다.
화폐단위 효과가 문제가 되는 이유
가장 큰 문제는 돈의 실제 가치보다 표현되는 단위에 따라 소비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5만 원은 아낀다.
그런데 5천 원을 열 번 쓴다.
100만 원 투자는 고민한다.
그런데 10만 원씩 열 번 추가매수한다.
연간 120만 원은 비싸다고 생각하면서 매달 10만 원은 별생각 없이 결제한다.
결국 사람은 큰 숫자에는 민감하면서 작은 숫자의 반복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할 수 있다.
그래서 자산관리에서는 개별 금액보다 누적 금액을 보는 습관이 중요하다.
작은 지출은 월간·연간으로 다시 합쳐보자
매일 5천 원씩 사용하는 소비가 있다고 해보자.
한 번은 작다.
하지만 한 달이면 약 15만 원이고 1년이면 약 180만 원이다.
그 소비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커피가 정말 좋다면 180만 원을 쓰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다.
다만 이렇게 질문해보는 것이다.
“나는 이 소비에 1년에 180만 원을 사용할 의향이 있는가?”
그 질문에도 YES라면 즐겁게 사용하면 된다.
문제는 내가 1년에 얼마를 쓰는지도 모른 채 매번 5천 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투자에서도 총액을 먼저 정하자
특정 종목에 추가매수할 생각이라면 매번 얼마를 살지만 결정하지 말고 최대 투자금액을 먼저 정하는 게 좋다.
현재 500만 원.
추가투자 한도 500만 원.
최대 1,000만 원.
이렇게 전체 그림을 먼저 만들어놓는다.
그러면 50만 원이라는 작은 매수금액 때문에 전체 투자위험이 커지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돈을 일부러 크게 묶는 방법도 있다
저축에서는 화폐단위 효과를 반대로 이용할 수도 있다.
월급통장에 돈을 계속 두면 생활비와 저축금이 섞인다.
그러면 조금씩 사용하기 쉽다.
반대로 1,000만 원을 예금이나 투자계좌로 옮겨놓으면 하나의 자산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다시 꺼내 쓰는 데 심리적인 저항이 생긴다.
그래서 저축계좌와 생활비계좌를 분리하는 것은 단순한 통장 정리가 아니다.
돈을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상태와 어렵게 소비할 수 있는 상태로 나누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김프로 한마디
어릴 때 어른들이 이런 말을 많이 했다.
“큰돈은 깨면 금방 없어진다.”
예전에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돈을 오래 관리하다 보면 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5만 원 한 장은 아까워하면서 5천 원씩 열 번 쓰는 것은 별로 아깝지 않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1,000만 원을 한 종목에 추가투자하라고 하면 부담스러운데 100만 원씩 열 번 물타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한다.
결과는 같다.
그래서 돈을 볼 때는 단위를 한번 바꿔보는 게 좋다.
작은 지출은 크게 합쳐보고, 작은 투자도 최종 투자금액으로 합쳐본다.
반대로 장기저축은 큰 덩어리로 묶어서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만든다.
돈은 숫자다.
그런데 사람의 뇌는 그 숫자를 항상 똑같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5만 원짜리 한 장과 1만 원짜리 다섯 장이 같은 돈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정작 어려운 건 소비할 때도 정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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