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 300만 원에서 315만 원으로 올랐다면 기분이 좋다. 통장에 찍히는 돈이 5% 늘었으니 당연히 생활도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같은 기간 내가 사는 물건과 서비스의 가격이 7% 올랐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돈의 숫자, 즉 명목금액이 늘어난 것을 실제 구매력이 늘어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화폐착각(Money Illusion)’이라고 한다. 월급뿐 아니라 예금금리, 투자수익률, 집값, 노후자금까지 우리가 돈을 판단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만날 수 있는 개념이다.

오늘 알아볼 개념은 무엇일까?
화폐착각은 돈을 평가할 때 물가를 반영한 실질가치보다 눈앞에 보이는 명목금액에 더 끌리는 경향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작년에 연봉이 5,000만 원이었다.
올해 5,250만 원이 됐다.
숫자로만 보면 5% 올랐다.
그런데 같은 기간 생활물가가 6% 상승했다면 내가 실제로 살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의 양은 오히려 줄었을 수 있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는 커졌지만 돈의 힘은 약해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물가를 일일이 계산하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5,250만 원’이라는 숫자를 먼저 보기 쉽다.
이게 화폐착각의 핵심이다.
이런 개념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화폐착각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꽤 오래됐다. 경제학자 어빙 피셔(Irving Fisher)는 1928년 The Money Illusion이라는 책을 통해 사람들이 화폐의 명목가치와 실질가치를 혼동할 수 있다는 문제를 다뤘다.
현대 행동경제학에서는 1997년 Eldar Shafir, Peter Diamond, Amos Tversky가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에 발표한 Money Illusion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화폐착각을 사람들이 경제적 거래를 판단하면서 실질가치뿐 아니라 명목금액에도 영향을 받아 명목적인 평가 쪽으로 편향될 수 있는 현상으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숫자를 못 계산해서 생기는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돈을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명목금액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왜 사람은 이렇게 행동할까?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명목금액은 눈에 보인다.
월급 300만 원.
예금금리 4%.
주식수익률 10%.
집값 5억 원.
그런데 실질가치를 알려면 한 단계 더 계산해야 한다.
물가상승률은 얼마인지, 세금은 얼마인지, 그동안 구매력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눈앞에 바로 보이는 숫자가 더 편하다.
미국 노동통계국(BLS)도 명목임금과 실질임금을 별도로 구분한다. 물가가 오르면 같은 금액의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가 줄어들기 때문에 구매력 변화를 보려면 물가를 제거한 실질값을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돈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가 항상 가장 크게 보이는 숫자는 아닌 셈이다.
실제 돈과 투자에서는 어떻게 나타날까?
투자에서는 수익률을 볼 때 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내 ETF가 1년 동안 8% 올랐다고 해보자.
보통은 이렇게 생각한다.
“올해 8% 벌었네.”
틀린 말은 아니다. 명목수익률은 8%다.
그런데 같은 기간 물가가 4% 올랐다면 내 자산의 실질적인 구매력 증가폭은 8%보다 작다.
세금과 비용까지 있다면 실제 체감 수익은 더 낮아질 수 있다.
예금도 마찬가지다.
금리 3%짜리 예금에 가입해 돈이 늘었더라도 물가가 4% 상승한다면 계좌 잔액은 증가하지만 구매력 기준으로는 손실일 수 있다.
노후자산에서는 이 차이가 더 중요하다.
미 연방준비제도 역시 고정된 명목소득을 제공하는 자산의 경우 예상보다 인플레이션이 높으면 실질 구매력이 빠르게 떨어질 수 있고, 은퇴생활 수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숫자로 보면 더 이해하기 쉽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현재 1억 원을 가지고 있고 1년 동안 5%의 투자수익을 얻었다고 가정한다.
1년 뒤에는 1억500만 원이 된다.
| 항목 | 금액·수익률 |
|---|---|
| 투자원금 | 1억 원 |
| 명목수익률 | +5% |
| 1년 뒤 자산 | 1억500만 원 |
| 가정한 물가상승률 | +4% |
| 대략적인 실질수익률 | 약 +1% |
정확한 실질수익률은 단순히 5%-4%=1%로 빼는 것보다 다음처럼 계산하는 편이 정확하다.
실질수익률 = (1+명목수익률) ÷ (1+물가상승률) – 1
따라서
1.05 ÷ 1.04 – 1 ≈ 0.96%
가 된다.
통장에서는 500만 원을 벌었다.
그런데 구매력이 늘어난 정도는 약 1% 수준인 것이다.
반대로 투자수익률이 3%인데 물가가 5% 오른다면 계좌 잔액은 늘었는데도 실질 구매력은 줄어들 수 있다.
돈이 늘었다는 것과 부가 늘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집값에서도 화폐착각이 생길 수 있다
10년 전 5억 원에 산 집이 6억 원이 됐다고 해보자.
1억 원이나 올랐다.
“20% 올랐네.”
그런데 이 10년 동안 전체 물가도 크게 올랐다면 6억 원의 구매력이 과거 6억 원과 같지는 않다.
게다가 취득비용, 보유비용, 이자비용, 세금까지 고려하면 실제 투자성과는 단순한 매수가와 현재가격 차이와 달라질 수 있다.
주식도 똑같다.
100만 원이 120만 원이 됐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동안 돈의 구매력이 얼마나 변했는가다.
그래서 장기투자를 볼수록 명목수익률과 실질수익률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왜 문제가 될까?
화폐착각이 강하게 작용하면 자산이 실제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은퇴자금 목표를 10억 원으로 정했다고 해보자.
지금의 생활비 기준으로는 10억 원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목표 시점이 15년 뒤라면 지금의 10억 원과 15년 뒤의 10억 원은 구매력이 다르다.
연 3% 물가상승을 단순 가정하면 지금 100만 원짜리 생활비 수준을 15년 뒤 유지하려면 약 156만 원이 필요하다.
같은 이유로 노후자금 목표도 단순한 금액 하나만 보는 것보다 미래의 구매력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폐착각은 당장 큰 손실을 만드는 심리가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건 오랫동안 자신이 부자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구매력은 거의 늘지 않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돈을 볼 때 숫자 하나를 추가하면 상당 부분 해결된다.
명목금액 옆에 실질금액을 같이 보는 것이다.
연봉이 5% 올랐다면 물가는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한다.
투자수익률이 8%라면 물가를 뺀 실질수익률도 본다.
예금금리가 3%라면 세후금리와 물가상승률을 함께 비교한다.
노후자금을 계산할 때는 10년, 20년 뒤 필요한 생활비를 현재 가치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장기 투자성과를 기록한다면 이런 식으로 두 줄을 만들어도 좋다.
명목수익률: +8.0%
물가 반영 실질수익률: +3.8%
조금 귀찮아 보이지만 이것만으로 계좌에 찍히는 숫자와 실제 부의 증가를 구분하기 쉬워진다.
자주 묻는 질문
화폐착각과 인플레이션은 같은 개념인가?
아니다. 인플레이션은 전반적인 물가수준이 상승하는 경제현상이다. 화폐착각은 물가 변화가 있는데도 명목금액을 중심으로 돈의 가치를 판단하는 심리적 경향을 의미한다.
명목수익률과 실질수익률은 무엇이 다른가?
명목수익률은 계좌에서 실제로 표시되는 수익률이다. 실질수익률은 여기에 물가상승으로 인한 구매력 감소를 반영한다. 장기간 자산이 실제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볼 때는 실질수익률도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금이 플러스 수익인데도 실질적으로 손해일 수 있나?
그럴 수 있다. 예금의 세후수익률보다 물가상승률이 높다면 계좌 잔액은 증가해도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의 양은 줄어들 수 있다.
주식시장에도 화폐착각이 나타날 수 있나?
학계에서는 가능성을 연구해왔다. 2005년 Cohen, Polk, Vuolteenaho는 주식시장의 가치평가에서도 화폐착각이 나타날 수 있다는 Modigliani-Cohn 가설을 분석했고, 연구 결과가 해당 가설을 지지한다고 보고했다. 다만 시장가격은 매우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화폐착각 하나로 주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투자를 하다 보면 계좌 숫자가 커지는 것만으로 꽤 안심하게 된다. 그런데 결국 내가 모으는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니라 앞으로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삶의 선택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장기투자 수익률을 볼 때는 가끔 한 번쯤 물어보면 좋겠다. “내 돈은 늘었는데, 내 돈의 힘도 같이 늘었을까?”
참고자료
- Shafir, Diamond & Tversky — Money Illusion,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 Princeton University — Money Illusion 연구 정보
- U.S. Bureau of Labor Statistics — Purchasing Power and Constant Dollars
- Federal Reserve — Inflation Dynamics and Monetary Policy
- Cohen, Polk & Vuolteenaho — Money Illusion in the Stock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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